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가상과 현실의 융합을 통해 인간의 생활양식이 최적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디지털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융합하는 대표적인 기술인 가상현실
(VR)과 3D 프린팅은 각각 가상과 현실에서 3D 데이터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다만 전자가 가상의 공간에서 3차원 정보를 구현하여 이용자들로 하여금 현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현실의 공간에서 3차원의 입체적 물건을 구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기술들은 최근 코비드19(Corona
Virus Disease 19, COVID-19) 확산 국면에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데, 사람들의 외부
활동이 제약되면서 집안에서 즐길 수 있는 VR 콘텐츠가 각광을 받는가 하면, 방역용품과 의료장비 등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3D 프린터를 이용한 일회용 검사도구나 산소호흡기 부품 등이 제작되면서 해당 기술이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가상현실과 3D 프린팅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이로 인해 야기될 범죄 발생 양상의
변화와 형사법적인 대응 방안에 대한 논의도 전개되어야 하는바, 이러한 필요성은 2D
데이터 구현 시대의 형사법적 대응 연혁을 고찰함으로써 확인될 수 있다. 예컨대 카메라나
복사기가 등장하면서 복사 문서를 둘러싼 법적 쟁점과 사진의 증거능력이 문제되었고,
컴퓨터와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 온라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법익 침해가 논란이 되었으며, 이를 규제하기 위한 일련의 입법적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입법 정비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법적 공백으로 인해 야기된 혼란 상황을 떠올린다면 3D 데이터 구현 기술이
범죄에 미칠 영향과 형사법적 대응 방안은 보다 선제적으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이 외부의 시각 정보를 차단하고 현실과 유사한 가상의 공간을 구현하여 사용자와의 상호 작용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이라면, 증강현실
(Augmented Reality, AR)은 현실 세계에 가상의 정보를 합성하여 영상 정보를 보여주는 기술이다.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과 관련해서는 시스템 오작동 및 부작용과 같은
기술 구동 과정의 문제와 함께 가상현실 내에서의 사이버 섹스와 아동 음란물, 사이버
폭력과 테러훈련, 사이버 도박 및 자금세탁 등이 법적 쟁점으로 거론되고 있다. 최근에는 코비드19 확산으로 인해 가상현실 기술이 엔터테인먼트는 물론이고 교육이나 부동산 거래 등 다양한 분야에 이용되면서 과장 광고나 사기죄 등의 발생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현존감과 몰입감을 그 특징으로 하는 가상현실을 둘러싸고 가장 많은
논란이 야기되고 있는 것은 바로 성범죄와 관련된 쟁점이다. 또한 가상공간의 결과물이 환전을 통해 실물화폐로 전환되는 플랫폼이 늘어나면서 가상세계가 자금세탁 및
탈세의 창구로 이용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바, 가상자산의 법적 지위나 이를 이용한
테러자금의 조달 및 자금세탁 등에 대한 논의도 전개될 필요가 있다.
제조 분야의 유망 기술 중 하나로 손꼽히는 3D 프린팅(3D printing)은 3D 도면을
바탕으로 3차원 공간상에 물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그러나 3D 프린팅과 관련해서도 유해물질의 발생이나 도면 및 결과물을 둘러싼 지적재산권의 침해 등 기술 구동
과정에서의 문제가 지적된다. 특히 3D 프린터의 보급 확산으로 인해 가장 크게 우려되고 있는 것은 총기나 무기 등의 제작이 용이해졌다는 점이다. 동 기술은 위조지폐를
만들기 위한 몰드 제작에도 이용될 수 있는데, 무엇보다 3D 프린터는 위조 동전을
만드는 데에 더 없이 완벽한 도구로 평가된다. 또한 3D 프린터를 이용하여 ATM 스키머를 제작한 후 현금자동입출금기에서 돈을 빼내거나 실리콘 위조 지문을 만들어서
부동산 사기 행각을 벌인 사건 등은 이미 국내외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나아가
동 기술과 관련해서는 동의 없이 특정인의 얼굴이나 신체를 복제하여 무단으로 섹스돌이 제작된 경우, 피해자의 법익을 민사상 초상권 침해의 측면에서만 다루는 것이
적절한지, 아동 형상의 리얼돌 제작과 판매 및 소지 등에 대한 형사상 규제가 필요한지
등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및 3D 프린팅은 형사사법 분야에 긍정적으로 활용될 여지가 많다. 이용자들이 현존감과 높은 몰입감을 느끼도록 하는 가상현실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예방 교육을 비롯해 범죄자나 형사사법 기관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각종 교육 및 훈련에 활용될 수 있고, 범죄 피해자 트라우마 치료에도
이용될 수 있다. 또한 증강현실 기술이 적용된 스마트 안경은 각종 조회 업무에 활용될
수 있다. 나아가 3D 데이터 구현 기술은 범죄현장을 보다 생생하게 기록하거나 재구성함으로써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특히 법정에
직접 제출되기가 어려운 피해자의 유골이나 흉기 등이 3D 프린터로 제작될 경우 법관이나 배심원들은 이를 통해 사건을 보다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3D 데이터 구현 및 융합 시대에 형사사법적인 대응 방안이 모색될 것이 요청된다. 우선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은 아동·청소년성착취물 제작·배포 등을 처벌하면서, 성착취물에 등장한 인물이 실제 아동·청소년인지 또는 가상의 표현물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법정형을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종래 헌법재판소는
합헌이라고 판단하였으나, 최근 동법 개정을 통해 아동·청소년성착취물 관련 범죄에
대한 법정형이 대폭 상향 조정되었고, 가상현실의 이용이 확대되면서 관련 범죄의
발생 양상이 다양해질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양자의 죄질이나 비난가능성을
재검토해서 법정형을 차등화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아동 형상 리얼돌의 수입·제작
등에 대한 처벌 규정이 신설되어야 하며, 리얼돌 제작 등을 위해 타인의 초상을 무단
사용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형사제재를 부과하는 방안이 논의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물리적 세계와 가상의 세계가 융합하고, 아바타를 매개로 진입한 가상세계 속의
일상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면 그 속에서의 성적 자기결정권도 보호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나라는 게임 결과물의 환전업 등을 금지하고 있으나, 다른 국가들이
이를 허용하는 상황에서 법 적용을 회피할 수 있는 우회로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달러와 유로와 같은 통화뿐만 아니라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로
환전이 이루어지고 있는바, 외국의 은행 계좌가 없더라도 암호화폐로 손쉽게 게임
결과물을 환전할 수 있다. 사회 전 영역에서의 디지털 전환은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고, 가상현실을 무대로 한 경제활동의 중요성은 점차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전자적 형태의 아이템이나 가상화폐 및 정보 등도 절도죄나 강도죄의 객체인 재물로
간주될 수 있도록 입법적 정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2020년 8월 정부는 수사기관이 용의자 및 수배차량 조회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증강현실 기술이 적용된 스마트 안경을 도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찰이 스마트 안경을 활용해 차량 조회를 넘어 안면인식을 통한 신원조회까지 하는 것은 국민적 반대에 가로막혀 시행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안면인식 기능 탑재에 대한 비판은 차치하고, 만약 사회적 논의를 통해 스마트 안경을
이용한 신원확인이 가능해진다면, 그 조회방법은 현행 「범죄수사자료 조회규칙」을
통해 명시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 경찰의 스마트 안경 활용에 대한 별도의 규칙이 제정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스마트 안경과 같은 이동형 영상촬영기기에 대해서는 사생활 침해나 촬영된 영상의 유출 문제 등이 지적되고 있으므로 법률을
통해 그 운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한편 법정에서 구현된 가상현실이나 3D
프린터 출력물은 사건 현장의 장면을 그대로 담은 것인지, 아니면 사건의 스토리를
재현한 것인지에 따라 증거로서의 성격과 그 증거능력이 달리 평가될 수 있다. 사건
발생 직후에 출동한 경찰이 범죄현장을 그대로 3D 스캔한 후 저장한 영상이 법정에
제출되었다면 이는 현장사진으로 볼 수 있다. 2016년 독일에서는 설계도를 바탕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VR로 구현되면서, 동 수용소의 경비원으로 일하며 17만여 명의
유대인 학살을 방조한 피고인의 혐의를 입증하는 데 활용되었다. 이 경우 가상현실
영상은 있는 그대로의 현장을 담은 것이 아니라 기록을 토대로 재현한 영상이므로
현장을 탐사하고 재현한 전문가 증언의 일부로 파악될 수 있다. 2018년 중국에서는
살인사건의 재판에서 목격자의 증언을 듣는 데 VR이 이용되었다. 가상현실은 증인이
사건 현장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도록 도울 수 있지만, 당시 검찰 측이 제작한
영상에는 처음부터 피고인이 자해를 하거나 피해자를 흉기로 찌르는 상황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증인의 진술이 부당하게 유도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나아가 재판에
VR이 활용될 경우 법관이나 배심원들의 사건에 대한 이해도를 제고할 수 있으나,
사실에 대한 인상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코비드19 시대에 가상현실과 3D 프린팅이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이는 갑자기
등장한 최신 기술이 아니며, 당장에 우리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바꾸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술이 어떻게 작동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이해해야 하고,
이 기술로 인해 발생할 법익 침해 양상의 변화와 형사법적인 대응 방안들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악하거나 선한 기술은
없다. 인간이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지가 문제될 뿐이다. 2019년 VR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손꼽히는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제러미 베일렌슨(Jeremy Bailenson) 교수의
저서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는데, 그 책의 제목은 ‘두렵지만 매력적인’이다.
형사법 분야에서 바라보는 가상현실과 3D 프린팅 기술이야말로 두렵고도 매력적인
기술일 것인바, 향후 이 기술들이 범죄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고, 수용자들의
의치를 신속하게 제공해줄 수 있는 매력적인 기술로 활용되기를 기대해본다.